구연영
(具然英)
(具然英)
권중희
(權重熙)
(權重熙)
김계남
(金癸南)
(金癸南)
김봉기
(金鳳基)
(金鳳基)
김원조
(金源祚)
(金源祚)
김태원
(金泰元)
(金泰元)
김하락
(金河洛)
(金河洛)
류달영
(柳達永)
(柳達永)
송천민
(宋天民)
(宋天民)
유택수
(柳澤秀)
(柳澤秀)
이기룡
(李起龍)
(李起龍)
이수흥
(李壽興)
(李壽興)
임형순
(任亨淳)
(任亨淳)
구연영(具然英)
1864년(고종 2)~1907년(융희 1) 7월
정의 | 한말 이천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이자 종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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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능성(綾城), 호는 춘경(春景)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듬해 1월 김하락·조성학·김태원·신용희 등과 이천으로 내려가 의병부대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하였다. 양근(楊根), 지평(砥平) 등지에서 의병 300명을 모병하여 안성 의병장 민승천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이 되었다. 1896년 1월 넓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첫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패주하는 적을 광주 장항 장터까지 추격하여 무기와 군량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다시 일본군의 보복공격을 받고 이현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병력의 열세와 심한 눈보라로 인해 패전하여 장졸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이후 박주영을 대장으로 삼아 이천수창의소를 재정비하여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입성하였다. 남한산성에서 일본군과 연합한 관군의 공격을 철통같은 방어로 격퇴시키는 한편, 인근 지역의 의병과 연합작전으로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남한산성이 함락되었고, 의병들은 흩어졌다. 이후 구연영은 남은 의병들을 수습해 안동지역으로 이동하였으나 김하락 대장과 뜻이 맞지 않아 30여 명의 이천의병들을 데리고 이천으로 돌아왔으며,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천 일대에서 포교와 함께 구국회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어 비폭력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아들 구정서(具禎書)와 함께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구연영은 의병 시절 항상 최선봉에서 적과 싸우는 등 구국을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았으며,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이천지역 초기 기독교운동에도 큰 공적을 남겼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79년 순국 추모비가 이천중앙감리교회에 건립하였다. |
참고문헌 | 『경기인물지』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권중희(權重熙)
1881년(고종 18)~?
정의 | 모가면 진가리 출신의 한말 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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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모가면 진가리 출생으로 병조부위를 지낸 관료 출신이다.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권중희도 의병을 모집하여 마을에 무기창고를 짓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항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군에 발각되어 추격을 받자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산중으로 피신하였고, 더 이상 뜻을 펴지 못하였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김계남(金癸南)
1902년(광무 2)~?
정의 | 마장면 오천리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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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마장면 오천리 출생으로 이천지역 독립운동 인물 중에 유일한 여성이다. 1942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4년 7월 출옥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김봉기(金鳳基)
1866년(고종 3)~1908년(융희 2)
정의 | 신둔면 남정리 출신의 한말 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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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신둔면 남정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정미칠조약이 발표되자 이천 이근풍의 집에서 주창룡·신규희·조상현·임옥여 등과 군포수 32명을 모집하고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때 이근풍을 대장으로 하고 김봉기는 진찰장의 직책을 맡아 출진하였으나 중도에 이근풍이 도주하여 김봉기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해 8월 15일 음죽군에서 순사분파소를 습격하고, 8월 21일에는 이천읍내를 기습하여 일본 기병을 물리친 뒤, 그 여세를 몰아 다음날 22일에는 이천읍내의 순사분파소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그 후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에 갔다가 전 한국군 정위 홍병수의 밀고로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고 1908년 5월 2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2년 3월 신둔면 주민들이 뜻을 모아 신둔초등학교 교문 옆에 추모비를 세웠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김원조(金源祚)
1885년(고종 22)~1923년
정의 | 율면 총곡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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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석윤(錫允), 호는 청송(靑松)으로, 율면 총곡리에서 태어났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율면 총곡리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단에 들어가서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징발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강화되어 활동이 어렵게 되었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신하던 중 1920년 12월 30일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3년 음력 4월 15일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김태원(金泰元)
1863년(철종 14)~1932년
정의 |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고 활동한 한말 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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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해풍(海豊), 자는 춘백(春伯), 호는 집의당(集義堂)이다. 서울 출신으로 별군직과 선전관을 지냈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김하락·구연영·조성학·신용희와 함께 이천에 와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이천수창의소 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천수창의소 선봉장으로 1896년 1월 광현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였고, 이현전투 패배 후에는 부대를 재정비하고 남한산성을 점령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이후 1907년 이강년(李康秊) 의진에서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이강년이 체포된 뒤로는 원주로 낙향하여 후진들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는 『집의당유고』가 있으며,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김하락(金河洛)
1846년(헌종 12)~1896년(건양 1)
정의 |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고 활동한 한말 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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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삼(季三), 호는 해운당(海雲堂)이다. 1895년 겨울 단발령이 공포되자 구연영·김태원·조성학·신용희와 함께 이천에 와서 의병을 모집하여 이천수창의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도지휘(都指揮)가 되어 광현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1986년 2월 13일 이현전투에서 패하였다. 이후 이천의진을 재정비하여 군사 겸 지휘의 임무를 맡았고, 2월 18일 남한산성을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동료의 배신으로 남한산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대장이 되었고, 경상도 안동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896년 이천지역에서 약 7개월간 활약한 김하락 의진은 이천의병의 중심이었다. 유고로는 『진중일기(陣中日記)』가 있는데, 이천지역 의병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진중일기』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류달영(柳達永)
1911~2004년
정의 | 대월면 고담리 출신의 농촌운동가이자 교육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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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성천(星泉)이다. 1911년 5월 6일 대월면 고담리에서 태어났다. 1930년대 최용신과 함께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2년 성서조선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후에는 농학연구 및 후진양성, 식량자족운동, 잔디 및 무궁화연구 등 실천적인 농촌운동을 전개하였다. 주요경력으로 서울대학교 원예학 교수, 통일부 고문, 원예학회 회장 등을 지냈고, 한국유기자연농업연구회, 성천문화재단 등을 설립했다. 저서로는 『유토피아 원시림』·『흙과 사랑』·『황무지공원』·『농촌계몽의 선구』 등이 있다. 2004년 정부는 류달영의 공적을 인정하여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있다. |
참고문헌 | 『농민신문』(http://www.nongmin.com) |
송천민(宋天民)
?~1592년(선조 25)
정의 | 이천지역 출신의 조선전기 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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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어려서부터 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고 부모의 병환에는 온갖 약을 구하여 병간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피난 도중 왜군이 쫒아오자 부모와 어린 동생의 생명을 구하고 왜군과 대적하다가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효행과 충절을 기려 정려의 은전을 베풀었다. |
참고문헌 | 『동국신속상감행실도』 |
유택수(柳澤秀)
1902년(광무 2)~1929년
정의 | 일제강점기 읍내면 중리에서 거주하며 활동한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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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전주(全州), 서울 출생으로, 아버지는 유창륙(柳昌陸)이다. 1920년 아버지를 따라 이천 읍내면 중리로 이사했으며, 이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부터 조선일보 이천지국 기자로 근무했다. 그해 5월 동생 유남수(柳湳秀)의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수흥(李壽興)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의부 특파공작원으로 국내에 입국하여 7월 10일 동대문파출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이천으로 피신해 오자 그를 만나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행동에 옮겼다. 한편, 10월 25일에는 유택수 단독으로 서울 수은동(授恩洞, 현 종로구 묘동) 대성호(大成號) 전당포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했는데, 이때 전당포 주인의 형 전기영(全基榮)이 유택수를 붙잡으려 하여 사살하였다. 그러나 연이은 사건으로 일본 경찰은 검거에 혈안이 되었고, 결국 11월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9년 2월 27일 이수흥과 함께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이기룡(李起龍)
1885년(고종 22)~1952년
정의 | 부발읍 출신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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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발읍 출신으로 3·1운동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투신, 항일운동에 나섰다. 임시정부에서는 임시헌법과 의정원법 제정, 의무금 모금, 인두세 징수 등의 입법활동을 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0월부터 1946년 12월까지 이천군수를 지냈고, 1948년 정부 수립 후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족특별법」이 제정되어 위원회가 구성되자 해외에서의 민족운동 경험을 살려 서울·경기지구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이수흥(李壽興)
1905년(광무 9)~1929년
정의 | 창전동 출신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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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연안(延安), 일명 성좌(聖佐)·성조(成槽), 아버지는 이일형(李日瑩)이며, 창전리 동촌(東村)에서 태어났다. 1915년 11세에 이천공립보통학교(현 이천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약 2년간 학교를 다니다 13세 무렵 학교를 자퇴하고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22년에는 만주지역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였다. 1923년 중국의 독립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만주참의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서울 동소문파출소와 백사면 현방리 일본군주재소 등을 습격하였고, 독립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해 9월 10일 유택수와 함께 안성군 일죽면 호남은행 안성지점을 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은행업무가 끝난 뒤라 포기하고, 대신 안성의 부호 박승육(朴承六)의 집을 찾아가 그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고 몸을 피하려해 사살하였다. 한편 ‘기내(畿內) 4대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일본 경찰은 이흥수와 유택수 검거에 혈안이 되었고, 결국 11월에 친지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1928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9년 2월 27일 유택수와 함께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당대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가로 활동한 삼균 조소앙은 이수홍의 의거를 일컬어 ‘국내 4개월 대전’이라 칭송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
임형순(任亨淳)
1870년(고종 7)~1908년(융희 2)
정의 | 백사면 송말리 출신의 한말 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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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 본관은 풍천(豊川), 아버지는 임규재(任圭宰)이며, 백사면 송말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순종 1)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들이 떨치고 일어나자, 고향인 송말리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이천창의소를 결성하였다. 임형순 부대는 주로 원적산을 근거지로 삼아 인근 지역 의병진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가며 이천을 중심으로 광주·양지·양근·여주를 무대로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5월 안동의 어느 계곡에서 전사했다고 전하며, 1993년 백사면 현방공원에 순국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
참고문헌 | 신배섭·이인수·임혜봉, 『이천독립운동사』, 이천시·이천문화원,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