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㶏)
(權鈞)
(金吉通)
(金命元)
(金安國)
(金祖淳)
(金左根)
(朴蘭英)
(朴命龍)
(朴咸)
(徐恭)
(徐訥)
(徐穆)
(徐選)
(徐神逸)
(徐弼)
(徐熙)
(成聃齡)
(宋時吉)
(宋馹)
(宋廷奎)
(宋瓆)
(讓寧大君)
(魚在淵)
(吳慶)
(柳公亮)
(柳譚厚)
(李耕俊, 景俊)
(李寬義)
(李基讓)
(李明孝)
(李聖任)
(李思晟)
(李栻)
(李坫)
(李濟臣)
(李震殷)
(李憲球)
(李弘望)
(任鼐臣)
(任有後)
(鄭礥)
(曺明勖)
(崔淑精)
(洪仁秀)
(洪洽)
강은(姜㶏)
1492년(성종 23)~1532년(명종 7)
정의 | 괴정육현의 한 사람으로 백사면에서 은거생활 한 조선 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청로(淸老), 호는 규정(葵亭), 아버지는 강자 인(姜子仁)이다. 관직으로는 검열과 예빈시참봉 등을 지냈다. 1510년(중종 5) 생원진사시(小科, 司馬試)에 합격하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삼등으로 급 제하여 검열에 임용되었지만 기묘사화로 과거시험 합격발표가 취소(파방, 罷 榜)되었다. 1546년(명종 1) 현량과가 복구되어 전적(典籍)에 올랐으나 사퇴하 고 백사면 우곡리 호암산에 서당을 짓고 은거생활하며 학문에만 힘썼다. 노후 에는 김안국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묘는 백사면 우곡리에 있다. |
참고문헌 | 『명종실록』·『중종실록』·『국조방목』 |
권균(權鈞)
1464년(세조 10)~1526년(중종 21)
정의 | 모가면 산내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경(正卿), 호는 유연당(悠然堂), 시호는 충 성(忠成), 아버지는 권형무(權逈武)이다. 관직으로는 예문관검열, 충익부도사, 의정부좌찬, 형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냈다. 1486년(성종 1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과 충익부도사를 지내면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 신 4등에 녹훈되었고,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졌다. 그 후 신진사림의 진출과 함께 훈구파로 지목되었는데, 연산군 때 아부와 순종으로 벼슬하였다는 대간 의 탄핵을 받았다. 1518년(중종 13)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사림파가 주동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로 공신호가 삭제되었다. 기묘사화 때 우의정을 지내고, 영창부원군(永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엄격하고 재주가 뛰어났 다고 한다. 묘와 신도비는 모가면 산내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중종실록』·『국조방목』 |
김길통(金吉通)
1408년(태종 8)~1473년(성종 4)
정의 | 신둔면 수광리에서 은거생활 한 조선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숙경(叔經), 호는 월천(月川), 시호는 문평 (文平), 아버지는 김효례(金孝禮)이다. 관직으로는 의영고부사, 사헌부감찰, 병 조좌랑, 한성부좌윤, 동지중추부사,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1453년(단종 1) 계 유정란이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퇴한 후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하였 지만 실패하고 사육신이 처형당하자 구명을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세조의 명 으로 체포되어 수일간 국문을 당하였다. 그 후 신둔면 수광리에 은거하였다. 유고로는 『월천집(月川集)』이 있으며, 묘와 사당은 신둔면 수광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성종실록』·『국조방목』 |
김명원(金命元)
1534년(중종 29)~1602년(선조 35)
정의 | 호법면 단천리 출신의 조선 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 시호는 충익 (忠翼), 아버지는 김만균(金萬鈞)으로, 호법면 단천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으로 는 종성부사, 동래부사, 한성부좌윤, 경기감사,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난을 수습하는 데 공을 세워 평난공신 3등에 책록 되었고 경림군(慶林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가 되 고 이어 팔도도원수로 한강 및 임진강 방어에 임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 으로 적을 막지 못하고 침공을 지연시키는데 그쳤다. 유학에 조예가 깊었고, 병서와 궁마에도 능했다. |
참고문헌 | 『명종실록』·『선조실록』·『국조방목』 |
김안국(金安國)
1478년(성종 9)~1*543년(중종 28)
정의 | 괴정육현의 한 사람으로 부발읍 죽당리에서 후진을 양성했던 조선 중기 문신·학자. |
---|---|
내용 |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 (文敬), 아버지는 김연(金璉)이다. 관직으로는 부교리, 예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지도인물들이 대부분 죽음을 당했지만 때마침 전라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가 있었던 탓에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 당했다. 1520년 이천 주촌(현 부발읍 죽당 리)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한편, 기묘사화로 백사면 도립리 로 낙향한 엄용순이 지은 육괴정에서 성담령·강은·오경·임내신 등 선비들이 자 주 모여 학문을 강론하며 시회(詩會)를 열었으니 사람들이 이들을 ‘괴정육현 (槐亭六賢)’이라 불렀다. 인종 묘정에 배향되고 설봉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유 고로는 『모재집』·『모재가훈』·『동몽선습』 등이 있다. |
참고문헌 | 『중종실록』·『연산군일기』·『국조방목』 |
김조순(金祖淳)
1765년(영조 41)~1832년(순조 32)
정의 | 부발읍 가좌리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풍고(楓皐), 자호는 초학노인(初學老人), 자 는 사원(士原), 시호는 충문(忠文), 아버지는 김이중(金履中)이며, 순조의 장인 이다. 관직으로는 대제학, 이조참의, 영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철종 때 안동김 씨 외척 세도정치의 기틀을 만들었다. 유고로는 『풍고집』이 있으며, 묘는 부 발읍 가좌리에 있다. |
참고문헌 | 『풍고집』 |
김좌근(金左根)
1797년(정조 21)~1869년(고종 6)
정의 | 백사면 내촌리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시호는 충익 (忠翼). 아버지는 김조순(金祖淳)이다. 관직으로는 이조참의, 공조판서, 이조판 서, 한성부판윤, 병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영의정 등을 지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인물로, 인품은 곧으면서 맑고 공평하였다. 묘는 백사면 내촌 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이천읍지』 |
박난영(朴蘭英)
1575년(선조 8)~1636년(인조 14)
정의 | 호법면 매곡리 출신의 조선 중기 무신. |
---|---|
내용 |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형백(馨伯), 시호는 충숙(忠肅), 아버지는 박 종수(朴宗秀)이다. 관직으로는 면천군수, 중군, 선위사, 선유사 등을 지냈다. 창성부사로 있던 1619년(광해군 11) 명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의 휘하장수 가 되어 후금 정벌에 나섰다가 광해군의 밀계에 따라 강홍립과 함께 후금에 투 항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후금에 억류당했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비 로소 길잡이와 통역이 되어 돌아와 양국 화친의 공을 세웠다. 그러나 1636년 (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박로(朴로)와 함께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인질로 잡혀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휘하의 청군 진영에 머무르게 되 었다. 청 진영에서는 왕자와 대신을 사신으로 보내라고 요구하였고,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종실 능봉수(綾峰守)를 능봉군(綾峰君)으로, 참판 심집(沈諿)을 대 신으로 가장시켜 청 진영에 보내었다. 그런데 이들 사신의 신분을 의심한 마부 대가 박난영에게 사실 여부를 묻자 박난영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실이라고 거 짓 증언하였다. 그러나 곧 능봉수와 심집의 정체가 밝혀졌고, 결국 박난영은 적진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한편 박난영은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겉으로 보이는 사실만으로 오랫동안 척화신의 공격을 받는 등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효종대에 자손들이 음서의 혜택을 받는 등 인정받았다. 그리고 1675 년(숙종 1)에는 마침내 충신으로 정려되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묘는 호법 면 매곡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효종실록』·『이천읍지』 |
박명룡(朴命龍)
1588년(선조 21)~1627년(인조 5)
정의 | 마장면 목리 출신의 조선 중기 무신. |
---|---|
내용 |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현숙(見叔),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출생지 가 여주 가남면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천시 마장면 목리 출신이다. 관직으로는 도총부도사, 조산만호, 고부군수, 평안도병마우후 등을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 후금이 항장(降將) 강홍립과 박난영을 앞세우고 쳐들어 와 의주(義州)가 함락되고 안주(安州)에서 화친을 청할 때, 혼자 성 위에 올라 가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묘는 마장면 이치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숙종실록』·『국조인물고』 |
박함(朴咸)
1398년(태조 7)~?
정의 | 장호원 봉미산에서 은거생활 한 조선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무안(務安), 아호는 봉암(鳳菴), 아버지는 박형(朴亨)으로, 이 천 무안박씨 입향조이다. 관직으로는 시강원찬선을 지냈다. 학문에 조예가 깊 고 덕망이 있어 시강원찬선으로 세자 단종을 가르쳤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 탈한 후에 귀양길에 오른 어린 단종을 호위하였고, 단종이 사사되자 벼슬을 버 리고 장호원 봉미산으로 은거하였다. |
참고문헌 | 이인수, 『이천의 인맥』, 이천문화원, 1997 |
서공(徐恭)
1101(목종 4)~1171년(명종 1)
정의 | 이천 출신의 고려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이천(利川), 아버지는 서균(徐鈞)이며, 서희(徐熙)의 현손이 다. 관직으로는 경령전판관, 지추밀원사 판삼사사, 양계병마사, 평장사 등을 지냈다. 의종 때 음보(蔭補)로 경령전판관이 되어 임금의 수레를 서도(西都)로 호위할 정도로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담력이 있고 무예에 능하였다고 한다. |
참고문헌 | 『고려사』·『고려사절요』 |
서눌(徐訥)
972년(광종 23)~1042년(정종 8)
정의 | 이천 출신의 고려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이천(利川), 시호는 간경(簡敬)·원숙(元肅), 아버지는 서희(徐 熙)이다. 관직으로는 판도병마사, 중대광, 삼중대광 내사령 등을 지냈다. 딸이 왕비가 되어 1022년(현종 13) 중추사 우산기상시에 오르고 내사시랑 판서경 유수사를 지냈다. 1041년(정종 7)에 궤장을 받고 중대광이 되었다. 병이 위독 해지자 임금의 문병을 받고, 삼중대광 내사령에 임명되었으며, 자손에게는 영 업전(永業田)이 하사되었다. 정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
참고문헌 | 『고려사』, 『고려사절요』 |
서목(徐穆)
생몰년 미상
정의 | 고려 태조 왕건이 복하천을 건널 수 있도록 도운 이천 출신의 나말여 초 지방호족. |
---|---|
내용 | 본관은 이천(利川)으로 이천서씨 시조 서신일의 조카이다. 고려 태 조 왕건(王建)은 후백제를 정벌하기 위하여 당시 한주(漢州) 소속의 황무군(黃 武郡)을 통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건과 군사들이 복하천에 당도하였을 때 홍수로 불어나 강의 수심을 알 길이 없었고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때 서목은 왕건의 군사를 인도하여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하였고, 그 덕에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할 수 있었다. 훗날 태조 왕건이 ‘큰 강을 건너면 이롭다’는 뜻의 ‘이섭대천(利涉大川)’을 지역에 하사하였고, 그것이 이천 지명의 유래되었다고 한다. |
참고문헌 |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 |
서선(徐選)
1367년(공민왕 16)~1433년(세종 15)
정의 | 이천 출신의 조선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대숙(大叔)·언부(彦夫), 호는 해화당(海華 堂)·신당(莘堂), 시호는 공도(恭度), 아버지는 현령 서원(徐遠)이다. 이천서씨 (공도공파) 중시조로, 관직은 경연참찬관, 보문각직제학, 집현전직제학 등을 지냈다. 1393년(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경력사도사로 있을 때 고향 이천에 향교가 세워지자 대제학 권근(權近)에게 부탁하여 「이천향교기」를 짓도록 했다. 1404년(태종 4) 형조의랑 때 설화(舌禍)로 여흥(驪興)에 유배되었고, 사 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계사(啓事)로 인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산(竹山)에 유 배되었다. 마음가짐이 굳세고 자신의 직무에 부지런하고 충실하였다고 하며,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설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유고로는 『 해화당문집 』 을 남겼다. |
참고문헌 | 『태조실록』·『세종실록』·『해화당문집』 |
서신일(徐神逸)
생몰년 미상
정의 | 이천 효양산에서 은거생활 한 나말여초 지방호족이자 이천서씨 시 조. |
---|---|
내용 | 신라 효공왕 때 아간을 지내다가 이천 효양산에 은거하였다. 이천서 씨(利川徐氏)의 시조이며, 우리나라 서씨는 모두 이천서씨에서 분리되었다. ‘사슴의 보은(서 처사 묘의 전설)’ 전설의 주인공으로, 묘는 부발읍 산촌리 효 양산에 있다. |
참고문헌 | 『고려사』·『증보문헌비고』 |
서필(徐弼)
901년(신라 효공왕 5)~965년(고려 광종 16)
정의 | 이천 출신의 고려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이천(利川), 시호는 정민(貞敏), 아버지는 이천서씨의 시조 서 신일(徐神逸)이다. 관직으로는 도필과 내의령 등을 지냈으며, 고려 개국공신 으로 광종의 정치개혁을 지지했다. 사후(死後)에 삼중대광 태사내사령에 추증 되었으며, 광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버지 서신일이 사슴을 구해준 덕분에 태 어났다는 이야기의 아이다. |
참고문헌 | 『고려사』·『고려사절요』 |
서희(徐熙)
942년(태조 25)~998년(목종 1)
정의 | 우리나라 최고의 외교가로 손꼽는 이천 출신의 고려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이천(利川), 자는 염윤(廉允), 호는 복천(福川), 아버지는 서필 (徐弼)이다. 관직으로는 광평원외랑, 내의시랑, 검교병부상서, 병관어사, 태보 내사령 등을 지냈다. 972년(광종 23) 10여 년 동안 외교적으로 단절돼 있던 송 에 사신으로 파견돼 국교를 회복하는데 공을 세워 검교병부상서에 올랐다. 993년(성종 12)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 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자 최량과 함께 적을 방어하며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으로 타당함 을 밝히고 중간에 위치한 여진족을 평정하자고 거란을 설득해 군사를 돌려보 냈다. 그 결과 강동6주에 성을 쌓아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지역을 다시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
참고문헌 | 노계현, 『고려외교사』, 학연문화사, 2000 |
성담령(成聃齡)
1452년(문종 2)~1523년(중종 18)
정의 | 괴정육현의 한 사람으로 신둔면 수광리에서 은거생활 한 조선 전기 학자. |
---|---|
내용 |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두문산인(斗文山人)·어조(漁釣), 아버지는 성희(成熺)로, 이천 창녕성씨 입향조이다. 일찍이 진사시험에 합격했으나 계 유정난이 일어나 일족이 모두 화를 입게 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신둔면 수남촌 (현 수광리)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낚시질로 소일하여 처사라고 불렸다. 기묘 사화가 일어나 모재 김안국(金安國)이 이천에 은거하자 백사면 도립리 육괴정 (六槐亭)을 중심으로 모인 ‘괴정육현(槐亭六賢)’으로 참여하여 시회를 열고 학 문을 강론하였다. 묘는 신둔면 수광리에 있다. |
참고문헌 | 『모재집』 |
송시길(宋時吉)
1597년(선조 30)~1656년(효종 7)
정의 | 이천 출신의 조선 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중립(仲立), 아버지는 송일(宋馹)이다. 관직 으로는 호조정랑, 승정원우부승지, 동부승지, 경주부윤 등을 지냈다. 1645년 (인조 23)에 금성현감 재직 당시 도둑이 많은 금성지역의 토포사를 겸했는데, 법을 바르게 다루면서도 지나치게 엄하지 않아 주민들이 법을 잘 지키게 되었 다. 효성이 지극하여 잠시도 부모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청나라 사신으 로 명을 받자 임금의 윤허를 얻어 성묘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효종실록』·『국조방목』 |
송일(宋馹)
1557년(명종 12)~1640년(인조 18)
정의 | 백사면 우곡리에서 은거생활 한 조선 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보(德甫), 호는 반학(伴鶴), 아버지는 송승 희(宋承禧)이며, 여산송씨의 이천 입향조이다. 관직으로는 예조좌랑, 사헌부 장령,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1599년(선조 32)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사간 이 되었는데, 이때 홍여순(洪汝諄)의 대사헌 임명을 둘러싸고 당략에 빠져 이 를 반대하는 소북파(小北派)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의 관직을 삭탈 하고 귀양 보낼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두 사람을 파직시켰다. 탄핵 사 건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백사면 우곡리(현 내촌리)에서 은거생활에 들어갔 다. 시와 술로 자적하며 학 두 마리를 길들여 벗을 삼았다고 한다. |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선조실록』·『국조방목』 |
송정규(宋廷奎)
1656년(효종 7)~1710년(숙종 36)
정의 | 이천에서 은거생활한 조선 후기 문신이자 효자. |
---|---|
내용 |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원경(元卿), 호는 우수(迂叟), 아버지는 송증 (宋拯)이다. 관직으로는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경성판관 등을 지냈다. 1701 년(숙종 27)에 인현왕후가 죽자 고부사(告訃使)로 청에 다녀왔으며, 1708년 강 원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절수(折受)의 폐를 상소하여 강릉·춘천·낭천 등 3읍의 절수를 폐지하게 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천 이호(梨湖) 곁에 작은 별장 을 지었다. 청백리로 녹선되었고, 효행에도 뛰어나서 1841년(헌종 7) 효자로 정려되었다. 묘는 백사면 내촌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국조방목』 |
송질(宋瓆)
1676년(숙종 2)~1781년(정조 5)
정의 | 백사면 출신의 조선 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중윤(仲潤), 호는 치암(恥菴), 아버지는 송정 택(宋廷澤)이다. 관직으로는 사헌부지평, 사헌부장령, 사간원정언, 세자시강 원보덕 등을 지냈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부터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39 년(영조 15) 세자시강원필선(弼善)·문학(文學)으로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문명이 높아 오군자(五君子)의 한 사람으로 호칭되기도 했다. 유고로는 『치 암집』이 있으며, 묘는 백사면 우곡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영조실록』·『증보문헌비고』·『국조방목』 |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년(태조 3)~1462년(세조 8)
정의 | 대월면 군량리에서 귀양살이를 한 조선 전기의 왕자. |
---|---|
내용 |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제(李褆), 자는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 (剛靖), 태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여흥민씨이다. 1404년(태종 4) 왕세자로 책 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왕세자로서 지녀야할 예의범 절이나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1417년(태종 17)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 봄으로써 더 큰 불신을 받게 되었으며,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인군(仁君)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도록 권하고 벌을 주기도 했지만 끝내 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1418년에 유정 현 등의 청원으로 폐위되었고, 그 후 부왕의 명에 따라 광주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했으며, 세종이 즉위한 이듬해 12월 상왕인 태종의 명에 따라 이천으로 배소(配所)를 옮겨 18년간 머물렀다. 『세종실록』을 보면, 1419년(세종 1) 왕 이 이천으로 배소를 옮긴 양녕을 위해 새 집을 짓도록 하고 이천현감을 판현사 로 승진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
참고문헌 | 『태종실록』·『세종실록』·『국조인물지』 |
어재연(魚在淵)
1823년(순조 23)~1871년(고종 8)
정의 | 신미양요 때 순국한 율면 산성리 출신의 조선 후기 무신. |
---|---|
내용 |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 시호는 충장(忠壯), 아버지는 어 용인(魚用仁)이다. 관직으로는 공충도병마절도사, 회령부사, 병조판서지삼군 부사 등을 지냈다. 1866년(고종 3)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어 프랑스 로즈 (Roze, P. G.)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여 발생한 병인양요 때 우선봉으로 병사 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1871년(고종 8) 미국 로저스 제 독이 이끄는 아시아함대가 강화도를 내침한 신미양요 때는 강화영 진무중군 (鎭撫中軍)에 임명되어 동생 어재순(漁在淳)과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廣城堡) 로 급파되어 결연한 항전을 진행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미군에 패해 전사하 였다. 중요민속자료 제127호로 지정된 생가와 사당 충장사(忠壯司)가 율면 산 성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쌍충집』 |
오경(吳慶)
1490년(성종 21)~1558년(명종 13)
정의 | 괴정육현의 한 사람으로 신둔면 장동리에서 은거생활 한 조선 중기 학자. |
---|---|
내용 |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계산(溪山), 아버지는 오예손(吳禮孫)이다.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학문에 진실로 뜻을 두고 김안국의 문하에서 수학 하였다. 문한(文翰)이 탁월하여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으 로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신둔면 장동리로 은거하였다. 이천에 있던 김안국, 엄용순, 강은 등과 함께 백사면 도립리 육괴정에 자주 모여 시회를 열고 학문 을 즐겼던 ‘괴정육현’의 한 사람이다. 묘는 신둔면 장동리에 있다. |
참고문헌 | 『경기인물지』 |
유공량(柳公亮)
1560년(명종 15)∼1624년(인조 2)
정의 | 호법면 유산리에 묘가 있는 조선 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언명(彦明), 호는 하담(荷潭), 아버지는 유익 (柳益)이다. 관직으로는 좌부승지, 형조참판, 경상감사, 황해병사, 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황해도관찰사 재직 때는 무능하다고 탄핵을 받기도 했으나, 『선 조실록』을 편찬할 때 호군으로 동지사(同知事)가 되어 참여하였다. 1615년 (광해군 7) 강변칠우(江邊七友)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내통해 영창대 군(永昌大君)을 임금으로 세우려 했다는 죄목으로 친국(親鞫)할 때 지의금부 사로 신문을 하는 추관(推官)이 되었다. 인조가 즉위한 뒤 역모자의 흔적이 있 다는 이유로 지정장소를 벗어날 수 없는 형벌인 중도부처 되었다가, 이괄(李 适)의 난이 발생하자 연루자로 지목되어 참수되었다. 이후 1627년(인조 5)이 괄의 난 때 억울하게 죽은 자가 분명한 사람을 신원하라는 교지에 따라 관작이 복위되었다. 묘는 호법면 유산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국조방목』 |
유담후(柳譚厚)
1623년(인조 1)~1686년(숙종 12)
정의 | 이천시 증일동 출신의 조선 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정부(正夫), 호는 결청재(潔淸齋), 아버지는 유훤(柳箮)이다. 관직으로는 홍문관부수찬, 울산부사,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 다. 1678년(숙종 4) 정언에 처음 부임한 후 사서와 지평 등을 지내고 은퇴하였 다가 1680년 헌납으로 등용,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울산부사로 부임하여 탐욕 스럽고 포악한 토호를 다스리고 어려운 송사를 잘 처결하였다고 한다. 학문과 육예(六藝)에 뛰어나고 성행(性行)이 청백하였으며, 유고로는 『성능유의(成 能遺義)』가 있다. 묘는 증일동에 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국조방목』 |
이경준(李耕俊, 景俊)
1574년(선조 7)~1613년(광해군 5)
정의 | 신둔면 고척리 출신의 조선 중기 학자. |
---|---|
내용 |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원경(元慶), 호는 미강(嵋崗), 아버지는 이제 신(李濟臣)이다. 신둔면 고척리에서 태어났다. 1608년(선조 41) 같은 서자인 서양갑(徐羊甲), 박응서(朴應犀), 심우영(沈友英), 박치인(朴致仁) 등과 함께 서얼들에게도 관계 진출의 길을 열어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 후 여주의 소양강 가에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강변칠우·죽림칠현이라 자 처하였다. 대북파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꾐에 빠져 영창대 군(永昌大君) 옹립을 위한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은을 강탈하였다고 허위로 자 백, 계축옥사를 일으켜 사형되었다. |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연려실기술』 |
이관의(李寬義)
1407년(태종 7)~?
정의 | 마장면 관리에서 은거생활 한 조선전기 성리학자. |
---|---|
내용 |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의지(義之), 호는 율정(栗亭), 아버지는 이지 (李知)이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기상·역학 등의 일반과학 분야까지 전심하여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율봉도찰방에 임명되었 으나 사퇴하고, 마장면 관리로 은거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천 설봉서 원에 제향되었으며, 묘는 마장면 관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성종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 |
이기양(李基讓)
1744년(영조 20)~1802년(순조 2)
정의 | 호법면 단천리에서 우거한 조선후기 실학자·천주교도. |
---|---|
내용 |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아버지는 이종 한(李宗漢)이다. 관직으로는 한성부우윤, 대사간, 예조참판, 좌승지 등을 지냈 다. 1788년(정조 12) 관직에서 물러나서 1795년 재차 벼슬길에 오를 때까지 7 년 동안 호법면 단천리 외가에 머물면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800년 진하부사 (進賀副使)로 청에 가서 천주교 교리를 직접 접하고, 귀국하여 이가환(李家煥)· 이벽(李檗) 등과 교유하였다. 이벽과는 세계와 우주의 기원 및 질서, 인간 영혼 과 후세 상벌에 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서학의 교리를 토론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들 이총억(李寵億)이 신자였던 관계로 고발당해 체포되었고, 단천(端川)에 유배되었다. 유고로는 『복암유고』가 있다. |
참고문헌 | 『영조실록』·『정조실록』·『국조방목』 |
이명효(李明孝)
생몰년 미상
정의 | 이천 안흥서에서 귀양살이 후 터를 잡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용인이 씨 이천 입향조. |
---|---|
내용 | 본관은 용인(龍仁), 호는 삼성재(三省齋), 아버지는 이성달(李成達) 이다. 일찍이 큰 포부를 가지고 학문에 정진하여 1525년(중종 20) 진사가 되었 으며, 대과에 뜻을 두고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가 일 어나자 연루되어 이천 안흥서(安興嶼)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터를 잡게 되어 후손들이 백사면에 세거마을을 이루었다. 묘는 백사면 조읍리에 있으며, 손자 이홍망(李弘望)으로 인하여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
참고문헌 | 이인수, 『이천의 인맥』, 이천문화원, 1997 |
이성임(李聖任)
1555년(명종 10)~?
정의 | 대월면 군량리 출신의 조선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중(君重), 호는 월촌(月村), 아버지는 이형 (李詗)으로, 대월면 군량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으로는 담양부사, 경상도관찰 사, 강원감사 등을 지냈다. 1577년(선조 10) 유학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하였으며, 1583년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申砬)의 종사관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자청해서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군사를 모집해 왜적을 토벌하려 했으나 전선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어 순찰부사가 되어 민병 800명을 거느리고 임진강 방어전에 참가했으나 패하여 달아난 죄 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고 목소리와 용모가 아름다워 오옥(五玉)이란 별호를 들었으며, 문과(文科)와 무 과(武科) 모두 장원을 한 문무겸장이었다. 묘는 마장면 관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국조방목』 |
이사성(李思晟)
?~1728년(영조 4)
정의 |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가 처형된 대월면 군량리 출신의 조선후기 무신. |
---|---|
내용 | 본관은 전주(全州), 대월면 군량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으로는 전라 우도수군절도사, 경상도병마절도사, 회령부사, 훈련원부정 등을 지냈다. 1711 년(숙종 37) 훈련원부정으로 참핵사(參覈使) 송정명(宋正明)과 함께 임시로 형 조좌랑이 되어 청국인 살해사건을 조사하였다. 1728년(영조 4) 평안도관찰사 로 있을 때 총융사 김중기(金重器), 금군별장 남태징(南泰徵) 등과 함께 소현세 자의 적파손 밀풍군 탄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반란을 꾀하였으나 계획이 사전 에 발각되어 진어대장(鎭禦大將) 장붕익(張鵬翼)에게 체포되었다. 이어 영조 의 친국을 받은 끝에 반란의 주동인물로 지목되어 처자식과 함께 처형당했다. |
참고문헌 | 『영조실록』·『경기인물지』 |
이식(李栻)
1659년(효종 10)~1729년(영조 5)
정의 | 이천읍내 동촌에서 세거를 시작한 조선후기 유학자. |
---|---|
내용 |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숙(敬叔), 호는 외암(畏庵), 아버지는 이제 헌(李齊憲)이다. 관직으로는 의금부도사, 장흥고주부, 송화현감, 세제익위사 익위(世弟翊衛司翊衛), 고성군수 등을 지냈다. 그의 선대는 본래 경기도 광주 에 세거한 사족(士族)이었으나 1694년(숙종 20) 이식이 광주 율리에서 이천읍 내 동촌(東村)으로 이거하면서 이천의 명문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암은 탁 월한 유학자로서 율곡 이이(李珥)의 성리설을 비판하고 「이기론(理氣論)」과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정밀하게 분석 연구하여 지론을 확립하는 등 퇴계 이황(李滉)의 학통을 따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을 지지하여 『사칠부설(四七附說)』을 저술하였다. 사학도 깊이 연구하여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를 탐구하여 왕이 필독할 책임을 강조, 찬양하는 서문을 지었 다. 1722년(경종 2) 세제익위사익위에 임명되어 세제 시절의 영조를 가르쳤 고, 1727년(영조 3)에는 세자익위사익위로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세 차례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728년(영조 4) 병으로 사직하여 이천 동촌으로 내려왔으며, 이듬해 8월 7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사후 이천 사림 들이 사당 원학사(願學祠)를 건립하고 영정을 봉안해 이암의 학덕을 추모했는 데, 현재 사당은 없어진 채 영정만 전한다. |
참고문헌 | 『경기인물지』 |
이점(李坫)
1446년(세종 28)~1522년(중종 17)
정의 | 이천지역에 생거한 조선 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숭보(崇甫), 시호는 문호(文胡), 아버지는 이 관의(李寬義)이다. 관직으로는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사헌부집의, 홍문관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형조판서, 성균관대사성 등을 지냈다. 1504년(연산 군 10) 한성부우윤으로 재직 중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몸가짐이 청 렴하고 대쪽 같아 가는 곳마다 청백이라 일컬어졌다. 묘는 마장면 관리에 있으 며, 신도비가 이천시 향토유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국조인물고』 |
이제신(李濟臣)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정의 | 신둔면 고척리 출신의 조선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몽응(夢應), 호는 청강(淸江), 시호는 평간 (平簡), 아버지는 이문성(李文誠)이며, 신둔면 고척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으로 는 승문원권지정자,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 사헌부지평, 진주목 사 등을 지냈다. 선조대에는 예조정랑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1년(선조 4) 울산군수로 나가 아전들의 탐학을 근절시키고 백성들의 불편 을 없애는데 힘썼다. 1581년 강계부사로 임용되었고, 함경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되자 패전의 책임으로 의주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으며, 이 듬해 1584년 신원되어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제신은 시문에 능하고 글씨 는 행서·초서·전서·예서에 모두 뛰어났으며, 청백리로 녹선되고 양근의 미원서 원과 청주의 송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유고로는 『 청강집 』 ·『 청강소설 』 · 『진성잡기』 등이 있으며, 묘는 남양주시에 있다. |
참고문헌 | 『명종실록』·『선조실록』·『국조방목』 |
이진은(李震殷)
1646년(인조 24)~1707년(숙종 33)
정의 | 백사면 출신의 조선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정숙(正叔), 호는 호봉(瓠峰)·호와(瓠窩), 아 버지는 이의무(李宜茂)이며, 백사면에서 태어났다. 관직으로는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종부시정 등을 지냈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지냈고, 그 후 공조좌랑으로 춘추사국을 겸임, 실록 편찬에 참여 하였다. 1695년 김제군수로 나가서는 백성을 구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고요하며 일의 소홀함이 없이 백성을 극진히 보살폈으나 말 수가 적어 화려한 말투 사용하기를 명예가 손상되듯이 여기니 이로 인해 뛰어 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다. 유고로는 『호와집』 세 권이 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
이헌구(李憲球)
1784년(정조 8)~1858년(철종 9)
정의 | 이천지역에 생거한 조선 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서(稚瑞). 호는 국간(菊幹). 시호는 충간 (忠簡). 아버지는 장현이다. 관직으로는 평안도관찰사,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우의정 등을 지냈다. 1842년(헌종 8)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산성에 군량을 비 축하고, 별무시를 실시했다. 1845년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52년(철종 3) 우의정이 되었고, 좌의정으로 있을 때는 삼정문란을 비롯한 당시 사회의 모든 폐단의 근원이 향리의 수가 과다하게 많기 때문이라고 주장 하면서 향리 수를 줄일 것을 건의했다. 1853년 광주유수를 지내고 궤장을 하 사받았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 철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
참고문헌 | 『순조실록』·『철종실록』·『국조방목』 |
이홍망(李弘望)
1572년(선조 5)~1637년(인조 15)
정의 | 백사면 출신의 조선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로(元老), 아버지는 이양진(李陽晋)이며, 백사면에서 태어났다. 관직으로는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홍문관수찬 등을 지냈다.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함평현감으로 재직할 때 쌀 300곡(斛)을 비변사에 바쳐 군수로 승진시키려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 으며, 선정을 베풀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현민(縣民)들이 자발적으로 송 덕비를 세워주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임금을 강화로 호종하였고, 후금과의 화약(和約)이 성립된 뒤 원창군(原昌君)을 왕자로 가장하여 신사(信 使)로서 심양(瀋陽)에 보낼 때 부사로 따라갔다. 후금 측에서 위협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로 임무를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 라, 인질 수백 명을 쇄환(刷還)하였다. 묘는 백사면 모전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국조인물고』·『국조방목』 |
임내신(任鼐臣)
1512년(중종 7)~1588년(선조 21)
정의 | 괴정육현의 한 사람으로 백사면 송말리 풍천임씨 입향조인 조선중 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조원(調元), 호는 어은(漁隱), 아버지는 임주 (任柱)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관직으로는 병조참지, 병조참의, 예조참의, 예문관검열,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1549년(명종 4) 홍문관수찬이 되고 사 헌부지평을 거쳐 예조정랑으로서 춘추관의 기주관이 되어 『중종실록』의 편 찬에 참여하였다. 백사면 송말리에 은거하여 도립리 육괴정에서 김안국 등과 교유한 ‘괴정육현’ 중 한 사람이다. 묘는 백사면 송말리에 있다. |
참고문헌 | 『명종실록』·『중종실록』·『국조문과방목』 |
임유후(任有後)
1601년(선조 34)~1673년(현종 14)
정의 | 부발읍 고백리 풍천임씨 입향조인 조선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효백(孝伯), 호는 만휴(萬休), 시호는 정희 (貞僖), 아버지는 임수정(任守正)이다. 관직으로는 호조참판, 예조참의, 담양부 사 등을 지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로 척화를 주장하였으나 이듬해 반란을 음모하던 아우 임지후(任之後)와 숙부 임취정(任 就正) 등이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울진 산중으로 내려가 고향사람들 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이어 1669년(현종 10)에 다시 담양부사로 나아가 재난에 처한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관품도 승 자되었다. 문장이 뛰어나 은퇴한 뒤에는 유유자적하며 「목동가(牧童歌)」를 지었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효종실록』·『국조방목』 |
정현(鄭礥)
1526년(중종 21)~1574년(선조 7)
정의 | 설봉서원을 건립한 이천읍 출신의 조선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경서(景舒), 호는 만죽헌(萬竹軒)·세한당(歲 寒堂)·소요산인(逍遙山人)·내욕거사(耐辱居士), 아버지는 정순붕(鄭順朋)이다. 관직으로는 충훈부도사, 사재감직장, 이천도호부사 등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15세의 어린 나이로 의복을 변장하고 노비 틈에 끼어 윤임·유관 등 대윤 일파의 동정을 염탐하여 보고함으로써 대윤을 제거하는데 적극 협력하였다. 그 공로로 위사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사재감직장에 제수되 었다. 1560년(명종 15) 이천도호부사가 되었고, 1564년(명종 19) 설봉서원을 건립하였다. 유고로는 『만죽헌유고』가 있다. |
참고문헌 | 『명종실록』·『연려실기술』 |
조명욱(曺明勖)
1572년(선조 5)~1637년(인조 15)
정의 | 이천부사를 역임한 조선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우(汝偶), 호는 율촌(栗村), 아버지는 조탁 (曺倬)이다. 관직으로는 예문관검열, 사간원정언, 사서, 예조좌랑, 경상도사, 이천부사 등을 지냈다. 1608년 선조 사후 탄핵을 받아 경상도사로 좌천되었다 가 재차 탄핵을 받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경기도 사를 거쳐 수찬, 교리, 지평, 장령 등 여러 관직에 계속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 임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후 영월군수, 울산부사, 태안군수, 영천군수 등을 역 임하였고, 1636년(인조 14) 이천부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 성으로 왕을 호종하다가 과로로 사망하였다. 뒤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안조실록』·『국조방목』 |
최숙정(崔淑精)
1433년(세종 15)~1480년(성종 11)
정의 | 대월면 고담리 출신의 조선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逍遙齋)·사숙재(私 淑齋), 아버지는 최중생(崔仲生)으로, 대월면 고담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으로 는 홍문관수찬, 예문관부교리, 승문원교리, 춘추관기주관, 사헌부지평,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1470년(성종 1) 형조좌랑·경연시독관에 개수(改授)되면 서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수에 참여한 공으 로 1품계(品階)가 올랐다. 성리학의 대가인 김종직과 강희맹, 그리고 대문장가 인 서거정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으며, 일세의 명현(名賢)으로 높은 시격(詩格) 을 지녔다는 평을 들었다. 대표적인 저서로 『소요재집(逍遙齋集)』 2권이 있 으며, 『동국여지승람』과 『동문선』에 여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묘는 대월 면 단월리에 있으며, 이천의 설봉서원에 제향되었다. |
참고문헌 | 『세조실록』·『성종실록』·『경기인물지』 |
홍인수(洪仁秀)
1804년(순조 4)~1869년(고종 6)
정의 | 이천 출신의 조선후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맹원(孟元), 호는 금석(錦石), 아버지는 홍영 용(洪永龍)이다. 관직으로는 북청도호부사, 대사간,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 수 찬관, 좌승지 등을 지냈다. 1834년(순조 34) 식년시 병과 2위로 급제하였으며, 1869년(고종 6) 사망했다. 묘는 백사면 모전리에 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 는다. |
참고문헌 | 『국조문과방목』·『국조방목』 |
홍흡(洪洽)
1509년(중종 4)~1563년(명종 18)
정의 | 이천 출신의 조선중기 문신. |
---|---|
내용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정부(正父), 아버지는 홍인필(洪仁弼)이다. 관직으로는 홍천현감 등을 지냈다. 모재 김안국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뛰어나 중종 때 학행(學行)으로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 후 홍천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으며, 효행이 뛰어나 김안국이 효아(孝兒)라 칭찬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난났으며, 묘는 부발읍 무촌리 에 있다. |
참고문헌 | 이인수, 『이천의 인맥』, 이천문화원, 1997 |